우발적인 살인 및 방화사건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화병(火病)이 우리나라사회에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50대 이상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화병이 최근에는 연령에 관계없이 확산되고 있다. 과거에 화병을 경험한 사람까지 합치면 전체 국민의 20%가 넘는다고 하니 우리나라 대부분 가정이 화병에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화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유의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의학의 ‘심신증(心身症)’이나 ‘정신병(精神病)’과 같은 범주에 속하면서도 ‘정신분열증세’와는 또 다른 병이다.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미국 정신과 협회(APA)에서도 1996년 화병을 문화관련증후군의 하나로 등록했다.

 

영문진단명으로도 ‘hwa-byung'이다. 학자들은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분위기가 강한 한국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질환으로 보고 있고 분노를 억제해서 생기는 분노 증후군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화병(火病) 또는 울화병(鬱火病)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가 반영되어 나타나는 질환으로 그 기전은 생활상에서 겪게 되는 강한 스트레스에 대해 분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억압한 결과로 화병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화를 참는 일이 반복되어 스트레스성 장애를 일으키는 정신 질환의 하나로 억울하고 억눌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지속되면서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서 결국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화병은 왜 한국에만 있을까? 그 이유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문화 때문이다. 전통적인 한국 가정에서 오랫동안 시집살이나 가장의 역할을 할 때 쌓인 분노, 화, 스트레스를 감정표현 억제를 통해 가라앉히다 보니 나중에 신체적 증상 등으로 폭발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화병은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으로서 <몸이 아픈 우울증>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우울감, 식욕 저하, 불면 등의 우울 증상 외에도, 6개월 이상 지속되는 가슴의 답답함이나 가슴조임, 호흡 곤란이나 심계항진, 두통, 근육긴장, 전신의 열감, 몸 전체의 통증 또는 목이나 명치에 뭉쳐진 덩어리의 느낌, 치밀어 오름,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자주 느낌, 깊이 눌려 있는 분노의 감정 등으로 나타난다.

 

우울증과 비교하면 우울증이 정신적 장애에 가깝다면 화병은 신체적·감정적 장애까지 동반한다. 우울증은 정신증상 위주로 우울함을 호소하고 부교감신경계가 과항진돼 있는 반면, 화병은 신체증상을 위주로 분노와 억울함을 호소하고 교감신경계가 과항진돼 있다.

 

정신적 요소가 신체 증상으로 표현되는데, 조금만 긴장하여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며 꿈을 자주 꾸고 잠이 깊이 들지 않으며, 귀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거나 귀가 멍한 느낌을 받으며,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거나 몸이 피로하고, 오후만 되면 얼굴이 일시적으로 화끈거리며, 때로는 몸에 한기를 느끼기도 한다.

 

또한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고, 활동이나 과로한 경우에는 더욱 심해지기도 한다. 과식, 과음, 흡연 과다, 욕설, 폭력 등 과격한 행동이 증가하기도 한다. 화병이 심한 경우 정신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화병이 단순한 우울증에 그치지 않고 다른 질환으로 발전해서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가래로 막을 수 있는 것을 호미로도 못 막게 된다.

 

화병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말하는 화병은 '심각성과 기간이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며, 개인의 일상 및 사회생활에 명백한 장애를 가져오는 경우'이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 중에는 자해와 자살 같은 극단적 행동을 하거나 지속적이고 심각한 심리적 신체적 증상으로 인해 사회생활에서 많은 장애를 겪게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적극적인 대처를 요한다.

 

화병은 총 4단계로 걸쳐서 발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단계 충격기는 충격을 받는 단계로 격한 분노의 상태에서의 누군가에 대한 배신감, 증오심등이 격하게 일어나는 감정상태를 말한다.

 

2단계 갈등기는 격한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이성을 회복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심각한 갈등으로 전형적인 불안증이 나타나며 집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지기도 한다.

 

3단계 체념기에는 “운명이다”“내 팔자다”라는 생각으로 체념 상태에 돌입을 하며, 화나갔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담담한 표정을 짓게 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 같이 보이기도 한다.

 

4단계 증상기에는 만성 스트레스 반응의 형태로 신체적 증상이 나타난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생각도 고이면 썩고 억울함도 가슴속에 담아두면 썩는다. 동일한 스트레스, 억울함, 분노 등이 6개월 이상 지속되거나, 가슴에 열이 나면서 뭔가 뭉친 듯한 느낌이 2주 이상 지속되면 화병을 의심하고 병원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화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증상, 정서, 사고, 행동, 환경에 대한 총체적인 치료 및 관리가 필요하다. 화병은 우울증 치료와 유사하게 약물과 인지적 치료를 비롯한 정신치료가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약물치료와 함께 전문의와의 정신치료를 통해 환자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대상에 대한 분노, 증오감 등을 제한 없이 표출하도록 해야 한다. 가족치료를 통해 환자의 처지에 대해 가족들이 공감하고 지지하는 것은 물론 가정에 존재하는 분노를 야기하는 요인들에 대해 가족 구성원들이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웃음 치료, 미술 치료, 음악 치료, 운동 치료 등의 재활 프로그램이나 약물 요법으로 치료한다.

 

상담과 약물 치료에 대한 효과가 높은 만큼 병원을 이용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자신만의 스트레스 극복 요령을 찾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 자신이 각자의 일상생활에서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생활자세가 화병의 더 근본적인 예방법으로 화병이 당신을 죽이는 것을 막을 수 있다.

 

 

(蛇足) 개개인의 화병은 일반적으로 치료에 반응을 잘하는 편이지만 국민전체가 앓고 있는 화병치료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나라의 지도자그룹들이 개개인의 삶속에서도 지쳐있는 국민들을 더 이상 화나고 억울하게 만드는 일을 그만 만들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그건 나라가 백성을 죽이는 행동이니까.

 

‘참는 것이 미덕’인 민초이지만 언제까지 참지만 않는다는 사실을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인지했으면 한다. 화병(火病)은 예방(豫防)이 중요하다.

 

 

김흥모 원장(정신건강의학과전문의 아주다남병원장)